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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오키나와 생활사』 (1) 그때 내가 느낀 건, 오키나와와 가난은 별개라는 거야. 그런데 나는 그 둘을 혼동해서 오키나와를 싫어했던 것 같아

by グローバル琉球・沖縄研究所 2024. 11. 22.

오키나와 생활사_들어가며

이해미

 

  이번 호에 소개할 ‘오키나와 생활사’의 주인공은, 60세 여성으로, 1955년 오사카 사카이시에서 태어난 오키나와 2세인 K·N 씨이다. K·N 씨의 증언을 히가 나오코 씨가 정리한 내용을 발췌해 번역했다.

  K·N 씨는 전쟁으로 모든 것이 불타버린 땅에서 나와 내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오키나와 주민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 가운데 ‘센카 아기야戦果アギヤー’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전과라는 뜻의 ‘센카’에 ‘~을 올리다’라는 오키나와어 ‘아기야’를 붙여 미군기지에서 군의 물자를 몰래 빼내는 행위를 일컫는다. ‘전과를 올리다’라는 은어로 당시 주민들 사이에 공공연히 유포되었다. 그 당시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전투로 생활 터전을 잃고 오로지 미군의 배급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배급마저 턱없이 모자란 탓에 ‘센카 아기야’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개중에는 훔친 물자를 자기보다 더 열악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나눠줘 영웅 취급을 받는 이도 있었다.

  ‘센카 아기야’를 막기 위해 미군은 경비를 강화했으나, 류큐 경찰은 이를 적극적으로 단속하지 않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허용한 정황도 포착된다. 이에 따라 ‘센카 아기야’의 행위는 점점 더 대담해지고 그 수도 늘어났다.

당시 이들의 행위가 단순히 물건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미군과의 ‘정의의 싸움’이라고 호명한 데에서 오키나와인의 강인한 생명력과 저항 의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공동체 의식과 오키나와 고유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했던 주민들의 노력과 오키나와 2세 K·N 씨가 직접 경험한 ‘센카 아기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때 내가 느낀 건, 오키나와와 가난은 별개라는 거야.
그런데 나는 그 둘을 혼동해서 오키나와를 싫어했던 것 같아

 

듣는 이_히가 나오코比嘉直子(55세)
말하는 이_오키나와 2세 K·N(60대)

 

— 오사카 사카이堺市에서 태어나셨죠?

  “사카이의 미야마초海山町라는 곳에서……. 아마 거기서 태어났을 거야. 오키나와 사람하고 재일 조선인이 주변에 많이 살던 동네였거든. 그러곤 내가 두 살 정도였을 때 간나베초神南辺町로 이사 가서 거기서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고.

 

— 그 간나베초에도 오키나와 사람들이 많이 살았어요?

  “거기는 오키나와 사람들만 모여 살았어. 작은 마을이라고 해야 하나? 집이 열두세 채 정도 모여 있는 그런 데.

 

— 아버님은 선생님께서 2살 때 편찮으셨던 거네요?

  “그렇지. 여동생이 아직 젖먹이였는데, 어머니는 여동생하고 오빠를 데리고 병원에서 간호하며 지냈고, 나는 언니랑 할머니 댁에서 지냈어. 그 후로 한동안은 아버지가 재활도 할 겸 고사리 전분으로 만든 인절미를 팔기도 하고,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군고구마를 팔기도 하고 그랬지. 어머니도 3년 정도 그 일을 같이 하다가, 나중에 아버지 건강이 좀 좋아진 후에는 연마일을 시작하셨어. 거기 사람들이 그 일을 많이 했거든. 할머니네도 그 일을 했었고. 그래서 아버지도 자연스럽게 연마일을 하신 거지. 반쪽이 다 마비된 몸으로 오키나와 사람들이 운영하는 근처 주물 공장에서도 일하고 그러다가 마흔둘에 돌아가셨어.

 

— 마흔둘이요?

  “맞아, 마흔둘. 젊은 나이에 그렇게 됐어. 서른두 살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종종 발작을 일으키곤 했는데, 돌아가시던 날도 그랬어.

 

— 그러면 선생님 가족만 간나베초로 가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줄곧 어머니께서 혼자 자식들을 키우신 거예요?

  “그렇지. 그렇게 내가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거기 살았어. 우리가 집을 얻어 살고 있었는데, 그 집주인이 거기를 일터로 넓힌다고 나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오쿠모토초奥本町라는 데로 다시 이사를 갔어. 거기에는 언니 가족들이 살고 있었거든. 그 집 2층으로 들어갔어. 그러다가 내가 17살이 됐을 때 어머니도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어. 그때 어머니가 42살인가 그랬어. 너무 젊은 나이였지.

  어머니가 입원해서 재활을 받으셨는데, 그때 나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거든. 일 끝나면 어머니 간병을 하고 학교를 나가는 생활을 반년 정도 했나? 여동생이랑 교대로……. 그때 걔가 중학교 2학년쯤이었나 그랬을 거야. 밥도 차리고, 집안일도 나눠서 하고. 그놈의 술이 원수였어. 어머니도 오래전부터 알코올 중독이 심했거든. 아버지처럼.

 

— 또 뭐가 기억나세요?

  “이사할 때 트럭에 짐을 싣고, 그 뒤를 졸졸 따라가던 장면이 기억나. 간나베초로 이사 간 후 철이 들었을 때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 뭐, 주변 사람들도 다 가난했지만, 죄다 오키나와 사람들이었어. 그래도 서로 도와가며 살았어. 아이들끼리 어울려 놀다 보니 서로 의지도 하게 되고 불안하지도 않았고. 거기서 지내는 동안에는 말이야. 그런데 학년이 올라가면서 내가 오키나와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오키나와? 너 오키나와 사람이야?”라고 되묻더라고. ‘사람’이라는 말을 붙이니까 어린 마음에 뭔가 거부당하는 느낌이었어. 꽁꽁 감추고 싶었던 것 같아. 뭐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느꼈던 거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차별이었어. 그래서 힘들었던 것 같아. 오키나와에도 가난하지 않고 배운 사람들도 있을 텐데, 우리 집은 그렇지 않다고 나 혼자 자격지심에. 그래도 우리끼리는 진짜 잘 뭉쳤어. 이웃이든 친척이든 무슨 일이 있으면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그랬는데 아이로서는 즐거운 일이었어. 가끔씩 오키나와 극단이 오기도 했고.

 

— 오키나와 극단이요?

  “응, 오키나와 극단이 왔는데 어른들도 좋아했어.

 

— 좀 더 자세하게 들려주세요. 밖에서 공연을 했어요?

  “맞아, 광장에서 했어. 진짜 재밌었어. 아버지도 도망치듯이 오사카 사카이로 온 건데, 동네 사람들하고 같이 산신三線(오키나와 전통 현악기)을 켜며, 이런저런 노래를 불렀어. 오키나와에서 본토로 여행가는 모습을 그린 <누부이쿠도치口説>라는 노래가 있는데, 오빠한테는 그 노래에 맞춰 부채춤을 추게 하고 말이야. 가난에 찌들어 살아도 음악과 노래, 춤 같은 건 늘 있었어. 그게 일상이었지. 우리 할머니도 노래를 정말 잘하셨어. 오키나와 특유의 창법 있잖아, 그런 간드러지는 하이톤으로 부르셨지.

 

— 그런 거 하면 몇 명이나 모여요?

  “동네에서 상을 치르면 초상날만 조문을 오는 게 아니라 나중에 기일에도 모여가지고는 부조는 아니지만 돈을 모아 가져오셨어. 그러면 와준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했어. 모르는 사람들도 다 와서 기도도 하고 명복도 빌어주고 그랬지. 관혼상제라고 하나? 결혼식은 그렇지 않았지만, 장례식이나 제사 때는 항상 그렇게 다들 와서 도와줬어.

 

— 그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게 했어요?

  “응. 아버지 초재랑 49재 때에 조금씩 돈을 모아서 가지고 다들 오셨지. 오신 분들에게 오키나와 가정 요리를 대접했어. 덴푸라나 돼지고기 채 썰어서 야채랑 같이 볶아먹는 이리챠イリチャー라고 있는데 뭐 그런 거. 비록 오키나와에 살진 않아도, 음식은 오키나와식으로 먹었거든. 두부 요리 같은 소박한 음식들이었지만, 그렇게 만들어서 다 같이 먹곤 했어. 그런 정에서 오는 안도감 그런 게 있었지.

  지금은 안 그러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유독 불단에 공을 들였어. 찬합에다가 삼겹살 삶은 거랑 덴푸라, 두부튀김도 튀기고 그랬어. 어묵이랑 떡은 몇 개를 넣으니 마니 하며 야단법석이었지. 그걸 또 멀리 있는 다이쇼쿠大正区 시장까지 사러 가곤 했어. 어머니도 그런 걸 잘 챙기셨고, 그건 오키나와에 살던 고조할머니(화자 어머니의 할머니)한테 배운 거였어. 우리도 그렇게 했지. 사카이에 살면서도 시미シーミー를 지켰어. 원래는 봄에 산소 앞에서 제사를 올리는 건데, 여기선 산소에 갈 수 없으니까 불단 앞에 모였지. 친척들이 다 모여서 시끌벅적했어. 그런 시간이 정말 필요해. 친척 간에 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중요한 시간이야. 사카이에 있으면서도 우치나구치로 오늘도 모두가 건강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기원하고 말이야.

 

— 그걸 다 기억하세요?

  “그럼, 기억하지. 아버지가 ‘누하饒波’라고 했었거든.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어.

  “누하의 조상님들, 후손들을 무사히 지켜주시고 아무쪼록 아무 일 없게 보살펴 주세요”라고. 불편한 왼손으로 매일 아침 그렇게 했는데, 조상님들을 말하는 것 같아.

 

— 그럼, 선생님은 결혼 전 성이 ‘누하’예요?

  “아니, 가메지마亀島야. 호적은 없어. 아버지는 오키나와에서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고 살다 이혼하고 여기로 오셨거든. 오키나와에서 도망치듯이 나와서.

 

— 이혼 때문에요?

  “아니, 아니야. 미군에서 물자나 식료품 같은 걸 훔쳐서. 그 당시 오키나와에서는 그런 일이 일종의 담력 시험 같은 거였거든.

 

— 그 미군 기지에서 물건을 훔쳐다가 주민들에게 나눠줬다는 ‘센카아기야戦果アギヤー’처럼요?

  “맞아, 센카아기야. 그걸 하다가 잡히면 큰일 난다고 해서 본토 오사카로, 처음엔 규슈에 있었다나? 아무튼 거기 있다가 사카이로 온 거지. 그래서 늘 잡히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사셨어. 이름도 여러 번 바꾸고. 겁이 많았던 거지. 다들 그런 식으로 담력 시험처럼 했었대. 그래서 사카이까지 오게 되었고, 일터에서도 사진 찍을 때면 숨어 계셨어. 신분 등록도 하면 잡힐 거로 생각하셨던 것 같아.

 

— 그렇군요……. 아버지께선 반신마비로도 산신을 연주하셨네요?

  “응, 연주하셨어. 그땐 상태가 좀 괜찮았던 것 같아, 젊기도 했고. 다리는 좀 절었지만, 노래도 부르시고. 지금 생각해 보면 목소리가 참 좋으셨어. 몸 안에서부터 땅이 울리는 것처럼 우렁차게 올라오는 소리였지. 그때 나이가 지금 내 큰아들보다 좀 더 많은 정도였어. 마흔까지 살았으니까, 요즘 우리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도 이랬겠구나 싶어. 30대, 40대 초반이었는데, 어린 나한테는 항상 커다란 존재였지만, 앞으로 살날이 더 많은 창창한 나이에 그런 병을 앓으셨으니. 그런데도 노래하고 산신을 연주하셨다는 게 참 대단해.

  이 노래를 부를까, 저 노래를 부를까 하면서 항상 노래를 달고 사셨어. 그때는 그런 게 일상이었지. 젊어서 오키나와에 있을 때도 많이 부르셨던 것 같아. 오키나와 노래는 같은 노래라도 지역마다 가사가 다르거든. 가사가 어러니저러니 하면서 노래를 부르셨지, 응.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가 쇼와昭和 43년, 그러니까 1968년이었는데, 그해 여름에 고시엔甲子園에서 오키나와의 고난고등학교興南高校가 준결승에 올랐어. 준결승에서 오사카의 고코쿠고등학교興国高校하고 붙었는데, 아버지가 그 경기를 보러 가셨어. 얼굴이 햇볕에 새까맣게 타고 목소리도 다 쉬어서 돌아왔지만, 참 기뻐 보이셨어. 비록 경기는 졌지만. 그리고 며칠 후에 돌아가셨어.

  오키나와의 고난고등학교가 고시엔 준결승에 오른 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거든. 그때는 아직 오키나와가 반환되기 전이라 고시엔의 흙도 가져갈 수 없었어. 아버지는 오키나와로 돌아가고 싶으셨던 것 같아. 고난고등학교가 준결승에 오른 건 아버지에게 큰 자부심이었겠지.

  “12년 정도 산 간나베초의 기억이 제일 선명하게 남아 있어.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말이야. 어디서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이 그리로 모여들었어. 삼보초三宝町나 미야마초, 간나베초는 사카이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사는 곳이야.

 

— 어른들은 모이면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이야기를 했냐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가도 결국에는 싸움이 났어. 만나면 술을 마시니까,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고 여자들은 울고 그랬어. 어머니도 이웃 사람들하고 같이 일했는데, 모두 술을 마시니까 다들 취해서는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노래 부르고 산신을 연주하고 춤추며 즐거워할 때는 좋은데, 꼭 그렇게 결국에는 싸움이 나거나 울고불고하니까 기쁘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모를 그런 기분이었어.

죄다 가난하고 힘드니까, 노래하고 산신 연주하며 서로를 격려했던 것 같은데, 어린 마음에 그게 싫었어. 어른들이 술 마신 후의 모습을 보면, 착잡하기도 하고. 그런 일이 자주 있었으니까. 세상 이야기나 오키나와 사람들 특유의 농담도 나누고, 그럴 때는 즐거웠지만, 결국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 드는 거야. 그래서 힘들었어.

문화 자체는 좋은데, 나는 뭔가 다른 무언가를 느꼈던 것 같아. 어머니가 장녀였으니까 다들 ‘언니, 누나’하며 우리 집으로 모두 모였는데, 각자 자기 가정을 꾸려도 늘 가난이 따라다니는 집안이었어. 이모도 역시나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

 

— 선생님께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어떤 아이셨어요?

  “유치원을 안 다녀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공부를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컸어. 그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는 긴장을 많이 했지. 배탈도 자주 나고.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점점 공부를 못 하니까 선생님한테 혼났어. 운동장에 작은 언덕이 있었는데 거기에 혼자 서있는 벌을 씌웠어. 그래서 6년 동안 공부를 못 한다는 열등감이 정말 컸어. 3, 4학년 때는 친절하게 공부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 계셔서 그때는 괜찮았는데, 그 외의 시간은 힘들었어.

저녁 할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어머니가 근처 이웃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셨어. 그렇게 해서 장을 보러 가고, 식재료를 사곤 했지. 생계지원도 받았는데, 예전에는 물품으로 받았어. 학교를 다닌다고 문구류 같은 걸 주는 게 싫어서 내가 그만두자고 했던 것 같아. 그래서 중학교쯤에 그만뒀어. PTA 회비도 못 내고, 급식비도 제대로 못 내고 그랬어. 회비를 아이들이 모아서 선생님께 드렸는데, ‘이번에도 또 안 가져왔냐’는 말을 들으면 창피해 죽겠더라고.

입을 옷도 좀 해지고, 속옷도 충분하지 않았고, 세 끼는 겨우 먹을 수 있었지만, 옷이나 그런 게 부족했어. 친구들 중에 ‘너희 집에 TV 있어?’, ‘냉장고 있어?’라고 물어보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대답할 수 없었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웃음). 가난, 그게 전부였던 것 같아. 그날 먹을 식재료를 사기 위해 돈을 빌리러 다니고. 그래도 오키나와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곳이어서 살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렇지 않았다면 더 힘들었을지도 몰라.

 

— 정말 힘드셨겠네요. 그 지역에 재일 조선인들도 살고 있었죠?

  “응, 맞아. 먹을 게 없어서 배고플 때, 조선인 아주머니가 집에 데려가서 밥을 먹여주셨어. 정말 친절하신 분이셨어. 너무 고마웠어. 아마 미야마초에서 그랬을 거야.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해 계셨었나 그랬고, 언니가 나를 돌볼 때였어. 그때 판잣집 사이로 어린 내가 들어가니까 한국 아주머니가 밥에다 간장 같은 매운 소스를 얹어서 주셨지. 지금 생각해 보면 상추였던 것 같아, 그걸로 싸서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어. 아이였는데도 매운 걸 잘 먹었어. 그때 아주머니의 웃는 얼굴이 아직도 기억나. 어릴 적의 즐거운 기억이야, 세 살쯤이었을 거야.

재일 조선인들과의 인연이 꽤 많았어. 훨씬 나중이긴 하지만, 오빠가 취직한 회사 사장도 한국 분이었어. 정말 친절하게 대해주셨지. 가족 모두를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도 대접해 주셨어. 그 회사가 이마자토今里라는 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한국 사람들과의 인연이 참 많았어.

 

— 오키나와가 복귀하던 해를 기억하시나요?

  “복귀는 내가 17살이 되던 해에 했어. 그러니까 1972년. 그때 부모님도 기뻐하셨지. 여권이 없어지고, 고시엔의 흙을 가져갈 수 있고, 달러가 아니라 엔화로 바뀌는 거잖아. 자동차도 오른쪽 핸들에서 왼쪽 핸들로 바뀌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들도 있었고. 드디어 복귀했구나, 잘됐다 싶었지. 이제 일본이 된 건가, 하는 생각도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었지만.

어렸을 때 ‘너 오키나와 사람이지?’라고 차별적인 말을 들었던 기억도 있어서, 복귀하면 그런 것도 없어지겠지 싶었는데, 그건 그대로 남아 있었어.

 

— 남아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어렸을 때부터 오키나와 사람과 일본인은 다르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복귀했다고 해서 갑자기 일본인이 되는 건가? 어쩐 건가? 하는 복잡한 감정이 있었어. 아이는 모르잖아. 미국에 20년간 점령되었다는 의미 같은 걸 말이야.

그래서 오키나와 사람과 일본인은 다르다는 인식만 깊이 박혀 있었어. 복귀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인종으로 생각하면

그 차별은 남겠지, 하는 그런 생각. 세상이 그렇게 보고 있다는 거니까. 그런 각인은 지워지지 않으니까.”

 

 

역자 이해미(李海渼_ Lee Hae-mi)

경희대 일본어학과 강사.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 『미래의 시대, 인문학이 말하다』(공저), 「한일 지도자의 연설문 분석-코로나 위기 속 신뢰 구축과 협력 촉구를 중심으로」, 「AI 기반 한일 번역 서비스 구축에 관한 언어학적 제언-일본소설 내 수동문 패턴을 일례로-」 등이 있다. lhmwave@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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